검사원 기억의 단상
어느 해 였던가 아주 무더운 여름이었다.
검사를 위해 선주와 약속을 잡고 약속장소로 향했다.
약속장소에 도착해서 선주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통화중이었다.
무더운 날이었지만 통화가 금방 끝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늘로 들어가서 뜨거운 태양을 피할 생각도 못하고 광합성으로 비타민 D를 합성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와의 약속된 시간이 거의 다 되었기 때문이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약속시간이 되면 다른 전화는 잠시 미루고 약속된 전화를 기다리던지 아니면 전화를 하던지 둘 중 하나를 선택 하니까.
5분쯤 지나서 다시 전화를 걸었다.
계속 통화중이었다.
뙤약볕에 5분밖에 서 있지 않았지만 온몸의 땀샘에서 먹었던 물이 되돌아 나오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 기억에 그날은 섭씨 35도를 넘는 불볕더위였다.
그래도 꾹 참고 다시 5분을 기다리기로 했다.
또 한번의 5분이 지난 뒤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래도 계속 통화중이었다.
슬슬 짜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무더운 날의 불쾌지수 탓이기도 했지만 무슨 사람이 약속을 해놓고 계속해서 전화만 잡고 있는지에 대한 또 다른 불쾌감 때문이기도 했다.
더 이상 그 자리에서 기다리다간 온몸의 물을 배출하고 아스팔트에 떨어져 녹은 아이스크림이 될 것 같았다.
‘안되겠다. 이 사람을 직접 찾아야겠다.’라고 생각하고 주변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전화가 계속 통화중이니 전화를 하고 있는 사람이 분명 나와 약속한 선주일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은근 내가 뿌듯해졌다.
잠시 ‘내가 천재가 아닐까?’ 하는 더위 먹은 생각을 하면서 주변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전화를 하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면 소풍날 보물찾기에서 보물을 찾은 아이처럼 무척이나 행복할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늘 속에서 전화를 하고 있는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 한 분을 발견했다.
‘혹시 저 분이 나와 약속한 선주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덮치려는(?) 찰나 내가 찾는 사람이 아니라면 굉장히 민망할 테니 조금 더 치밀하게 심증을 확증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확실하게하기 위해 전화하고 있는 사람 옆에서 더위를 피하는 척하면서 선주에게 다시 전화를 시도 했다.
(그늘 속으로 들어간 건 그날의 살인적인 더위에서 살기위한 본능이었을지도 모른다.)
전화를 해서 계속 통화중이라면 내가 찾는 사람이 거의 맞을 것이라는 심증이 확신으로 바뀔 테니까
‘나는 주도면밀한 사람이니까.’
역시나 통화중이었다. 내 옆에서 전화를 하고 있는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이 내가 찾는 선주가 맞는 것 같았다.
확신이 생기자 이제 전화가 끝나기만 기다리면 되니까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옆에서 기다리면서 전화가 끝나기만 기다렸다.
그런데 시간이 한참 지나도 전화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대화내용이 좀 심각해 보였다. 얼마나 심각하게 대화를 하는지 내가 옆에 있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전화내용을 들어보니 이 분이 무슨 범죄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 같았다.
경찰과 통화하는 듯 했는데 통장이 어쩌고, 주민번호가 어쩌고 하는 대화 내용이 옆에 있는 나에게 들렸다.
선주는 대화의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듯 했고 게다가 통장번호도 모르고 주민등록증도 없다고 전화 상대방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때 불현 듯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 이 전화가 요즘 유행한다는 보이스 피싱이 아닐까? 좀더 대화 내용을 들어보고 판단하자. 난 계속 주도면밀한 중이니까’
잠시 옆에서 전화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들어보니 의심이 확신으로 변했다.
‘아! 그냥두면 안되겠구나. 내가 끼어들어서 뭐라도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자 또 다시 본능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선주의 앞에 서니 선주는 내 작업복을 보자 깜짝 놀라는 듯 했다.
그러더니 입에 손을 가져다 대고 쉿! 조용히 하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중요한 대화를 하고 있는 중이니 끼어들지 말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하지만 더 있다가는 세상물정 잘 모르시는 시골 어르신이 보이스 피싱단에 거액을 털리시겠구나 하는 생각에 나는 다급하게 선주의 전화기를 빼앗아 들었다.
선주는 화들짝 놀라 나에게서 전화기를 빼앗으려 했지만 나는 그런 선주를 저지하고 대신 전화를 받았다.
“저는 이 전화기 주인의 아들되는 사람입니다. 아버님이 연세가 있으셔서 말씀하시는 내용을 잘 못 알아 들으시는 것 같으니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화자(話者)가 바뀌자 전화 상대방도 당황했는지 잠시 말이 없어졌다.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그러자 전화 상대방이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
내용인 즉 자기는 서울경찰청 ○○경사인데 ○○범죄자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선주님의 통장이 범죄에 연루된 정황이 있어 수사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래서 통장 계좌번호와 신분증을 확인하고 비밀번호를 알려주면 범죄에 연루된 정황을 확인해 본다나 뭐라나 하여튼 막장 드라마의 클리셰 같은 소리를 해댔다.
“여보세요. 여기가 아주 촌구석 시골 같아도요 경찰서도 있고 우체국도 있고 없는 것 빼고 있을 건 다 있는 동네입니다. 우리 아버님이 범죄에 연루된 사실이 있으면 여기 경찰서 가서 조사 받으면 될 것 아닙니까? 여기 경찰서 가서 조사 받으시라고 할 테니 사건을 이쪽 경찰서로 이관해 주세요”
이렇게 이야기 하자 상대방이 갑자기 더 당황했는지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중요한 사건이라 못 넘긴다나 어쩐다나
“아니 우리 아버님이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닌데 뭐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그리고 범죄자도 아니고 통장을 이용당한 피해자 같은데 중요하면 이쪽 경찰서를 통해서 직접 체포해가시지 이렇게 전화로 할 건 뭡니까? 그러지 마시고 이쪽 경찰서로 이관해 주세요. 그러면 저희가 직접 찾아가서 조사 받겠습니다.”(그땐 광역수사대가 있는지도 몰랐었다.)
이렇게 강하게 나가자 상대방도 잠시 생각하더니 마지못해 알았다고 사건 그 지역 경찰서로 이관하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보이스 피싱범도 경력이 많은 노련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전화를 끊자마자 내가 선주에게 말했다.
“○○선주님 맞으시죠? 이 전화 아무래도 요즘 유행하는 보이스 피싱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렇게 막무가내로 전화를 뺏었습니다. 양해하십시오. 그리고 진짜 범죄에 연루됐다면 여기 경찰서로 이관해 주라 했으니 경찰서에서 전화 올 겁니다. 그러면 그때 경찰서 가셔서 차분히 말씀하시고 조사 받으시면 됩니다.”
그랬더니 선주도 자기도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면서 시골사는 사람이 무슨 범죄에 연루될 일이 있겠냐면서 고맙다고 했다.
며칠 뒤 선주가 선박검사증서를 찾으러 사무실에 오셨길래 궁금해서 물어봤다.
“선주님 혹시 경찰서에서 연락 왔던가요?”
그랬더니 선주님이 나에게 한마디 하셨다.
“오긴 개뿔이 온다요. ○○놈들 시골 노인네한테 뭐 뜯어먹을게 있다고 여그까지 전화○을 해서 ○○인가 몰러. 어쨋거나 검사원 양반 고맙소∼잉”
보이스 피싱단에 묵직한 육두문자를 날려주시곤 돌아나가셨다.
진짜로 범죄에 연루되어서 경찰서에서 전화받고 조사를 받고 하는 그런 반전은 없었다. 역시나는 역시나였다.
역시 나는 천재에 치밀한 사람이 맞았나보다.
그 뒤로 나는 자만심에 쩔어 잠시 나의 SNS 닉네임이 ‘멋진 천재’였던 적이 있었다.
계절이 봄을 스치듯 지나 여름으로 갈 생각을 하니 잠시 잊고 있었던 기억의 단상을 끄집어내서 끄적거려 봤다.
아무것도 아닌 글을 아까운 시간 내주셔서 여기까지 읽어 주셨다면 대단히 감사합니다. 댁내 두루두루 행복하시고 편안하시고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끝.
※ 본 내용은 실화 95%에 5%의 픽션이 포함되어 있습니다.